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잭슨 (문단 편집) == 위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마이클 잭슨 포스터.jpg|width=100%]]}}} || || {{{#!wiki style="text-shadow: 3px 3px 0px silver, 6px 6px 9px silver; font-size: 1.5em; font-weight: bold; letter-spacing: 17px;" KING of POP}}} || >'''King of Pop''' >'''팝의 황제'''[* 번역을 올바르게 하면 '팝의 왕' 혹은 '팝의 제왕'이 알맞으나 '팝의 황제'로 굳어졌다.] >---- >마이클 잭슨을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 팝 음악과 R&B 음악의 흐름이 마이클 잭슨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으며, 팝 시장을 넘어 전 세계 대중문화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어마 무시하다. [[1964년]], 6세의 나이로 [[Jackson 5]]의 리드보컬로 데뷔했는데 잭슨은 음악가 출신 아버지에게 강도 높은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형제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의 리드보컬로 데뷔하며 일찍이 가요계의 스타 자리에 올랐고,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팝 시장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입지와 영향력을 지금까지도 행사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20세기 대중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변화로 평가되며, 단순히 음악계를 넘어 20세기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대중 가요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마이클 잭슨이 필수적으로 언급된다.] 미국 팝 시장에서 흑인 가수의 비율이 높지 않았던 시절, 전 세계적 문제였던 [[인종차별]]을 음악을 통해 완화시키며 문화 예술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이전까지 미국 팝시장의 주도권은 늘 백인 싱어에게 쥐어져 있었으나, 잭슨이 등장한 이후 최초로 [[미국 흑인]]이 가요 시장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 이후 팝 시장에 등장, 정상에 등극한 흑인 싱어들은 마이클 잭슨의 성공사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록 음악]]에서 팝 / 알앤비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의 등장이 대중음악을 주름잡는 장르의 종류마저 변화시키게 된 것이다. 그의 압도적인 성적에 걸맞게,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업 수익을 남긴 아티스트이다. 전체 앨범 판매량은 비틀즈와 엘베스 플레슬리 뒤를 이은 3위이고, 단일 앨범 판매량[* ]은 압도적인 1위이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생전과 사후 합쳐 약 800여개의 상을 수상하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기록되어 있다. 마이클 잭슨은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금전적인 자선활동 외에 자신의 음악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였다. [[Heal the World]], [[Black or White]], Earth song, [[We Are the World]], What more can I give 등의 곡들이 대표적. 이러한 곡들을 통해 잭슨은 세계 평화, 친환경 운동, 전쟁 반대, 테러 반대 등의 메시지를 던졌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공연을 가지며, 한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실제 통일하면 공연하러 오겠다는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생전에 이 공연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날 공연에서 역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퍼포먼스가 공연 중간에 등장하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_r0fCVfPQfU)]}}}||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 [[https://www.worldrecordacademy.com/entertainment/most_successful_entertainer_of_all_time-Michael_Jackson_sets_world_record%20_90258.htm|Most Successful Entertainer of All Time]]]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었고,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평가받으며 이는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그는 팝 역사상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 공식적으로 39개의 자선단체를 지원하며 생전 5,000억 원 가량을 기부하였다. 이는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105188-most-charities-supported-by-a-pop-star/|팝스타가 지원하는 최대의 자선단체]]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으며 [[노벨평화상]]의 후보에 두 번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근 20년간 지속된 언론의 [[루머]]가 이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이기도 했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하나의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앨범 [[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었고[* 공식 기록 6,600만 장, 비공식 기록 1억 장 이상] [[We Are the World]]와 같은 음악 활동과 기부로 박애주의적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Bad]], [[Dangerous]] 등을 성공시키며 대중에게 전례 없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처음 등장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잭슨은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성추문 [[루머]]로 인해 언론들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되어 버렸고 그를 정신이상자[* 일명 Wacko Jacko. 2000년대에도 이 루머는 지속되어서 당대 디스로 제일 유명했던 [[에미넴]]에게도 디스당한 바 있다.][* 사실 그는 2002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아이를 보여달라는 팬들의 성원에 생후 8개월 된 어린 자녀를 호텔 창문 밖으로 내미는 시늉을 해서 비판받았다. 이는 언론이 의도적으로 영상을 느리게 보이게 해서 아이를 오랫동안 발코니 밖에 내미는 것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것은 자신의 큰 실수였다고 사과하였다.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언론이 너무 무책임하다며 비판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9ElddgJCgyg|Michael Jackson dangles his baby over a hotel balcony]]]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언론의 매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2차 아동 성추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그는 대부분의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몇 년간 칩거 아닌 칩거를 하게 되었다.[* 사실 그의 재판이 시작된 2004년부터 그의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으며 사실상 정상적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던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4년만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런던에서의 콘서트 투어 계획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같은 해 7월부터 런던에서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활동 재개가 눈 앞에 왔지만, 6월 25일 주치의였던 콘레드 머레이의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인한 심장마비로 향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속되는 그에 대한 수많은 더러운 루머들은 그의 문화적 유산과는 별개로 그의 위상을 추락시켰으며, 전문가들은 그의 이름이 음악사에서 잊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선행에 따라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음악의 영원한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